픽션들과 알레프를 통해서 보르헤스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던 탓일까?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읽으면서 웬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픽션들과 알레프를 통해서 이미 ‘보르헤스의 단편이 선사하는 경이로움’을 이미 경험해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픽션들과 알레프의 경이로움이 어느 정도 희석되고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한번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작품이야말로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를 입문하기 위한 안내자라는 것이다. 이후 보르헤스의 작품이 지니게 될 대략적인 윤곽과 단편만을 고집하는 보르헤스의 이야기 구성과 서술 형식,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공통분모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물론 픽션들이나 알레프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현학적인 무장으로 똘똘 뭉친(철저하게 압축되어 있는) 난해함의 난..
환상과 현실… 살만 루슈디의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형태의 소설을 이상적으로 구현함에 있어서 그가 만들어낸 환상은 자신의 시대, 자신이 경험한 시대를 겹쳐내면서 현실 위에 강력한 버팀목으로 세울 수 있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었다. 신비롭고 주술적인, 그리고 고유의 정서적 문화적 배경들이 삽입되면서 환상은 더욱 환상적이고 자신이 체험한 동시대의 이야기가 흐르면서 현실감은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게 된다. 피렌체의 여마법사를 읽으면서 무언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바로 ‘현실’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살만 루시디가 경험한 20세기의 모습들이 배제되어 있는 무굴 제국의 이야기는 20세기와는 어떠한 교차점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가 배제되어..
독재는 언젠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비극이 끝나면 행복이 오게 될까? 아니 또 다른 비극이 새롭게 시작 될 것이다. 혼란이 끝나면 안정과 평화가 온다고? 아니 새로운 혼란의 시작일 뿐이다. 파키스탄에서는… 살만 루슈디가 ‘수치’를 통해서 펼쳐낸 이야기들은 그물로 엮어져 있는 것 같다. 몇 개의 이야기 조각들이 접점을 만들어가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해 간다. 전체적인 큰 줄기를 중심으로 뻗어 나온 이야기들 역시 종속적인 관계라기 보다는 대등하게 펼쳐나가면서 이야기꾼 살만 루슈디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주술적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의 존재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살만 루슈디 특유의 환상적인 이미지와 종교적, 주술적 신비로움으로 포장..
시대는 조선시대인가요? 아닙니다. 20세기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문장에 중후함이 가득한가요? 아닙니다. 익살이 가득 담겨 있는 유쾌함과 통쾌함이 있습니다. ‘황제를 위하여’를 읽으면서 ‘이문열’의 재능을 다시 한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하니…’라고 시작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익살극을 마치 대하사극과도 같은 고풍스러움을 담아서 순식간에 작품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일제 치하에서부터 해방을 지나 6.25로 이어진 민족의 비극, 그리고 냉전 시대와 근대화를 거친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단 ‘황제’를 중심으로… 황당할 수 밖에 없는 한 과대망상증 환자가 펼쳐나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시종일관 일관된 중후함과 품격을 유지..
삶이라는 것은 우연의 연속이다. 그리고 우연이라는 계산할 수 없는 변수와 모순적인 함수를 거치면서 결국 나오는 해답은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삶의 영역을 탐구해가기 위한 함수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밀란 쿤데라는 삶이라는 것을 수학으로 가정할 때 함수의 역할은 소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별의 왈츠’에서 일어난 한가지 삶의 우연은 루제나의 임신이다. 그리고 루제나의 삶의 결과는 죽음이 된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수많은 삶의 영역은 개인에게 있어서 저마다의 고유한 부분들이 있지만 예기치 않게 다른 이들과 공유하게 되면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작은 파장은 엄청난 결과를..
오셀로의 줄거리가 어떻게 되지? 무하마드 알리가 캐시어스 클레이였지! 헤밍웨의의 손녀가 얼마나 미인이였던가! 맞아! 클린턴 대통령의 스캔들... 이 대사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맥베스였던가? 제이 개츠비의 실패는 생각난다! 성을 찾아가던 토지측량사도... ‘I’m your father.’를 연상할 수 밖에 없겠지 ‘스카이워커’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면… ‘포스’가 함께 하길이 무슨 뜻인지는 알잖아! 살만 루슈디의 ‘분노’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탄생 된 이야기의 결정체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이 책의 번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역자후기에서도 알 수 있듯 작품 속에서 수많은 미디어의 영향력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 된다. 단순히 나열에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보다 작품에 대한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왜 마지막으로 갈수록 미궁이 되지?” 토마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놀라움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물음표가 쏟아져 나올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읽는 내내 느끼게 되는 기묘한 감각 또는 기이한 감각은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결말이 생략되어 버린 이야기는 당황스러움보다는 웬지 당연하게 납득을 하게 된다. 마치 처음부터 완성될 수 없었던 퍼즐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남겨진 공백은 기묘할 정도로 작품을 재미있게 만들게 된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의문점을 가질 수 밖에 없지만 불확실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예상 밖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라푼젤’이 탑에서 나와 보다 넓은 확장되어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듯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미지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프라하는 악(惡)의 도시이다.” “체코 민중은 자신의 죽음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깡그리 망각할 때까지 되풀이된다.” “민중을 일소하려면, 먼저 그들의 기억부터 지워야 해. 그래서 민중의 책,문화,역사를 파괴하는 거야. 그 다음 다른 사람을 시켜서 새 책들을 쓰게 하고, 새 역사를 지어내도록 해야 하지.” 밀란 쿤데라에게 있어 체코는 불명의 가치를 지닌 국가일지도 모른다. 망각으로 잊혀지지 않도록 웃음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짧은 이야기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사상의 침범을 받은 체코의 이야기, 사상의 영향을 지닌 체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를 반복하고 자신의 생각을 투영시킨다. 웃음으로 그리고 망각으로 마지막에는 웃음과 망각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에로티..
“광대는 왜 테러리스트가 되어야 했을까?” ‘한밤의 아이들’에서 살만 루슈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환상적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현실 위에 덧씌워진 환상의 존재는 독자들에게 꿈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지만 강력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믿을 수 없는 환상이기 때문에 믿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인식하게 하며 작가의 조용한 외침에 호소력을 높인다. 인도의 아픔을 담아서 들려주는 역사의 그림자를 이야기하면서도 신비한 능력을 지닌 아이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광대 샬리마르’에서는 이 같은 환상은 축소, 아니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대신 이야기의 스케일을넓히고 개별적인 캐릭터들의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엮어가면서 밀도 높은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2..
‘정체성’을 읽으면서 특징적인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 중 하나는 모호함 일 것이다. 특히 어떠한 단어를 규정함에 있어서 사전적인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감성적인 단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이 때 사용되는 단어는 관념적이고 모호하다. 마치 시와 같은 함축성을 지니면서 생각의 우물을 끌어올리게 만든다. 소설을 진행함에 있어서 명확하게 구분되고 확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이미지들을 텍스트로 추상화시킨다. 때문에 큰 사건이나 풍부한 이야기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이라는 소설은 풍부하게 느껴진다.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박자 쉬어가게 된다. 이 같은 모호함은 ‘정체성’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의해서 소설의 느낌을 완성해 나간다. 그리고 이 것은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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