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는 냉전시대를 기나긴 3차 대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향수’는 3차 대전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향을 떠나 오랜 망명 생활 동안 자신의 존재를 지켜왔던 이들이 3차 대전이 끝난 후(소련의 붕괴와 함께 이루어진 냉전 시대의 종결) 다시 한번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들이 느끼는 ‘향수’는 각각의 존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그려나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어떤 형태로 삶의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과거의 기억들은 얼마나 많이 재생 될 수 있고 또 얼마만큼 망각의 형태로 잊혀지게 되는지 보여준다. ‘향수’와 ‘망명’…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체제하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버린 두 단어는 밀란 쿤데라의 손을 거치면서 곳곳에서 충돌하기 시작한다. 정작 작가자신은 정치적 해석..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느림’이라는 소설의 분량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때 긴 분량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장편 소설 치고는 상당히 적은 분량이다. ‘느림’을 읽어나가는 시간 또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리게 진행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게 되고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고 싶어진다. ‘느림’이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독서의 즐거움이 함께 하는 것이다. ‘느림’의 이야기에는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소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 인물, 사건, 배경을 위주로 전개해 나가지 않고 외적인 화자의 액자 속 이야기와 또 하나의 액자식 이야기를 병치시켜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짜여진 이야기 대신 각각의 세..
띠지에서 ‘사형장으로의 초대’를 가장 환상적인 소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일까? 내게 있어서 이 작품은 당황스러운 소설로 기억 될 것 같다. 주인공 친친나트C가 사형을 선고받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무엇 때문에 사형이라는 선고를 받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투명한 존재들 속에서 불투명함을 인식했다는 식으로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유추될 뿐이다. 감옥이라는 제한 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알 수 없는 이야기와 제한 된 등장 인물들로만 전개해 나가는 사건들이 약 3주간에 걸쳐 진행 되다 몇 개의 반전을 거치고 주인공의 사형으로 끝이 난다. 일반인들이 투명한데 주인공은 불투명해서 사형 받았다고? 그러면 투명함과 불투명은 무엇을 상징한 걸까? 정치, 이데올로기, 개..
밀란 쿤데라는 소설가로서의 자신은 자신이 쓴 소설의 그림자 속에 감추어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같은 바램이 이루어지기는 무리였던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쿤데라의 필모그래피가 자연스럽게 겹쳐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읽으면서 쿤데라의 그림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가정은 무의미 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쿤데라의 아이덴티티와 오리지널리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쿤데라의 그림자를 걷어내기란 불가능이 아닐까? 한 시인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는 ‘생은 다른 곳에(삶은 다른 곳에)’는 쿤데라의 자전적 삶이 녹아 들어간다. 쿤데라 자신의 삶의 궤적과 일치시킨 것은 아니지만 쿤데라의 삶과 주변 환경, 쿤데라..
“지금 당신이 한 말들은 모두 지나치게 피상적이예요.” 쿤데라의 이야기는 모호하다. 이야기가 모호하고 표현방식, 문장에서 선택되는 단어의 의미가 모호하다. 인물에 대한 묘사도 명확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불친절하게 때문에 끊임없이 사고할 수 밖에 없는 아니 사색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된다. 장면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없고, 치밀하게 짜여진 듯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크로키를 보듯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이미지로 관념적인 단어들로 채워놓는 경우가 많다. 쿤데라가 만들어내는 모호함은 중첩되고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다성적인 의미들로 엮어진다. 허술하게 이어진 듯한 장면은 보이지 않는 생략의 과정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되는 사색의 과정을 거치며 풍부한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게..
아키라에서 묘사된 미래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현실감이 느껴진다. 가상의 세계를 상상력으로 재현해낸 네오 도쿄의 무대는 반항적인 공기들로 채워져 있다. 마치 현실의 일탈적인 행동을 위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만 같다. 대재앙 이후의 세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그야말로 딱!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현실적인 이미지를 가상의 미래사회(아키라가 연재되었던 시점은 1982년이였다.)를 배경으로 매우 디테일하게 심어 놓았다. 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는 사회, 범죄가 끊이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사회, 분열될 수 밖에 없는 집단, 그리고 겉으로는 기술의 정점에 서 있는 과학자들의 이기적인 호기심이 상위에 위치하고 작품의 큰 무대 위에서 움직인다. 마치 현재 우리 사회의 불안정함이 보이고, 오직 욕망을 위해서만 움..
현재와 같은 로맨틱 코메디 또는 러브 코메디 장르가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마츠모토 이즈미의 ‘오렌지 로드’(집영사의 주간소년점프 1984년 15호부터 1987년 42호까지 연재-1986년 15호부터 87년 11호까지 휴재가 있었음), 타카하시 루미코의 ‘메존일각(도레미 하우스: 소학관의 청년지 빅코믹 스피리츠 1980년 창간호부터 1987년 19호까지 연재)’의 대히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소년지와 청년지에서 각각 성공을 거두면서 수많은 미디어로 재생산되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으면서 수많은 만화팬들에게 화자되는 명작으로 기억되는 작품을 넘어서 이후 만화계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강담사의 소년매거진에서 연재한 아카마츠 켄의 러브히나(러브 인 러브)를 비롯하여 수많은 메..
명탐정 코난을 보면서 언제나 농담 삼아 키드야 말로 진정한 실버불렛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검은 조직이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로 그들의 심장부까지 파고들어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실버불렛은 아카이 슈이치도, 에도가와 코난도 아닌 쿠로바 카이토, 즉 괴도 키드라고 말입니다. 물론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 에도가와 코난이야말로 진정한 실버불렛이라고 베르무트는 확신하고 있으며 작품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웬지 결정적인 조커로 활용되어 대활약을 펼칠 것 같은 캐릭터로 괴도 키드가 생각납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마술쇼에 감추어져 있는 키드의 엄청난 능력은 그야말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키드의 마술세계가 기적으로 평가 받는 이유도 그가 선보이는 마술보다는 언제나 함정일 줄 알면서..
스포츠물이야 말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재능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장르가 아닐까? 스포츠라는 소재가 일반적으로 가지게 되는, 그리고 표현하게 되는 특유의 성장 드라마에서 느낄 수 있는 노력의 진실됨과 과정의 중요성, 경기장에서 펼쳐내는 치열한 승부의 세계가 선사하는 긴장감, 승리의 순간 느껴지는 환희, 패배의 순간 느껴지는 좌절, 그리고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목표를 달성한 순간 느끼는 뿌듯함은 그 어떤 장르보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풍부하게 요구된다. 그리고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 같은 감정들을 누구보다 탁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이고 그 느낌들을 독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연출해 낼 수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몬스터’(스토리 구성-나가사키 타카시)나 ‘20세기 소년’(스토리 구성-나가사키 타..
우메즈 카즈오는 훗날 어떤 작가로 기억되게 될까?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공포만화의 대가? 재주가 많았던 방송인? 아니 거장이다. 호러물의 대가를 넘어 수많은 만화가들에게 존경 받는 만화계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확고히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며 시대를 앞서가는 걸작들을 탄생시키며 만화계에 획을 그은 작품들을 발표한 일본현대만화사에서 빠져서는 안될 작가이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우메즈 카즈오의 작품들은 호불호가 갈리지만 작가적 평가를 할 때만큼은 최고로 평가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특히 스토리 전개나, 캐릭터 구성, 작화나 연출 등에서 완벽하지 않은(오히려 비판 받는 경우가 많고 스토리 전개상의 옥의 티가 보이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약점마저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장점을 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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