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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여자공병 by 마츠모토 지로

sungjin 2016. 6. 25. 15:31


"어디 사는 멍청이가 우주에서 반물질폭탄의 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이차원(異次元)의 입구 따위는 열릴 리 없었을 것이다.

 

어디 사는 멍청이가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았다면,

인류가 이차원에 이주하는 일 따위 없었을 것이고, 독립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 사는 멍청이가 이차원 물리 따위 연구하지 않았다면

차원병기 같은 걸 인간이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 사는 멍청이가 차원병기 같은 걸 전쟁에 투입하지 않았다면

내가 여자공병에 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과학기술을 아득히 뛰어넘는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거대로봇은 교복을 입은 여고생과 같은 외형을 지니고 있다. 놀랍게도 이 병기는 외형만이 아니라 실제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쉴새 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요즘의 평범한 여고생과 똑같이 행동한다. 하지만 마냥 귀엽게 행동하는 여고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대로봇은 여자공병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적인 살육을 저지르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이자 최강의 병기로 사용되어 참혹한 현장의 중심에서 보는 이들을 충격의 세계로 안내한다.

 

귀여운 여고생의 말투가 말풍선을 채우면서 그로테스크한 살육의 처절함이 지면 위에 펼쳐진다. 거친 펜선에 묵직함을 실어서 끝없이 계속되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작품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끄집어 낸다. ‘차원병기’, ‘차원세계와 같은 과학적 상상력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설정의 재미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기이하고 괴기스러움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정작 이 같은 괴기스러운 테크놀로지의 중심에서 귀여운 여고생들의 이야기(누가 봐도 이건 로봇이 아니라 여고생의 일상이다.)가 재기발랄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여자공병의 파일럿의 정신은 점점 파괴되고 물리적이면서도 정신적인 극한의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극도의 긴장감, 혼란 등 정신세계의 카오스는 결국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마약에 찌들어 있는 듯한 혼란의 바다로 잠수하고 만다. 그리고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들의 정신까지 극한 스트레스 상황으로 몰아붙인다.

 

도대체 어디까지 파괴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작품을 읽고 있는 나까지도 정신이 오염되는 것 같다. 여고생이 펼쳐내는 괴기스러운 그로테스크함은 대극의 위치에서 미묘하게 비틀어버린 감각마저도 오염시켜버린다. 흔하디 흔한 SF적인 상상력이 흔하디 흔한 여고생의 학원물의 일상의 풍경이 흔하디 흔한 거대병기의 전투장면이 함께하면서 전혀 흔하지 않은 독특함이 유쾌하면서도 불쾌한 느낌으로 보는 이들을 중독시킨다.

도대체 얼마나 이 작품에 중독되어, 아니 오염되어 버린 것일까?

 

테크놀로지의 정점에서 완성된 병기의 고도화는 필연적으로 파일럿의 정신붕괴를 일으킨다.’라는 설정이 얼마나 익숙한가? 차원이라는 설정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배경이 이제는 전혀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여고생의 외형을 한 로봇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다. 그 로봇이 정말 여고생처럼 행동한다고? 만화니까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수수께끼를 쏟아내고 궁금증을 폭발시키는 작품은 얼마든지 있지. 작가의 펜선이 자아내는 괴기스러운 연출의 힘은 분명 대단하지만 우리는 훨씬 더 대단한 만화가를 알고 있잖아? 그런데 이런 작품은 정말 충격적이다.

 

어떤 수식어를 사용해서 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까?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말로 다른 이들에게 이 작품의 매력을 설명할 수 있을까? ‘혼자 즐기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큰 것 같아요. 누군가와 이 작품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요.’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면 너무 추상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