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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소료 후유미가 청년지에서 작품을 발표할 때만 하더라도 기대보다는 우려감이 컸다.(혹시 우려감을 가진 사람은 나 하나 뿐 이였던 것은 아닐까?) 재미와 감동이라는 기본적인 공통 분모에서 분명 그녀의 작품은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남과 여라는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이렇게 작가의 재능을 무시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의 가능성을 보는 재능이 부족했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다. 그녀의 작품이 지닌 경쟁력은 남과 여라는 성별과는 상관없이 어디에서든 강력하기 때문이다.

 

 

“영원의 안식처~Eternal Sabbath”를 읽으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소재도 소재지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무엇인지 알려주었고, 마지막까지 늘어지고 쳐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이야기의 강약을 분배하고 탁월한 구성력을 보여주었다. 보는 이들에 따라 결말에 대한 평가가 다르게 나오기는 하지만 적어도 본인에게 있어서 이 작품을 평가하게 된다면 기승전결의 구성과 극적인 긴장감, 이야기의 흐름의 강약을 어떻게 할 때 그 시너지 효과가 커지는지 보여준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순정만화잡지에서 보여준 감성연출의 장점이 청년지에서 시도한 사건의 구성력과 긴장감의 유지력, 그리고 청년지 특유의 남성 독자들을 위한 소재와 아이디어 속에 녹아들면서 소료 후유미의 청년지 안착을 훌륭하게 이끌어 내게 된다.

 

영원의 안식처 이후 두 번째로 모닝에서 연재한 “체자레~파괴의 창조자”는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더 끌어올려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실제의 역사적 인물과 시대의 모습들이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되어 작품을 보는 내내 절로 탄성을 지르게 만든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화면 구성과 디테일한 소품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화면 연출에서부터 치열했던 시대의 그림자들이 압도적으로 펼쳐진다. 극의 긴장감을 올리고, 이야기의 강약을 조절하는 법에 있어서 이제는 원숙한 경지에 이른 작가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보는 내내 압도당하게 된다. 섬뜩함을 넘어서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그 강렬함이 남긴 인상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소료 후유미는 ‘체자레’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을 만화적 상상력을 주입하여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이야기의 힘을 실었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에도 강력한 힘을 실었다. 작품 속에 펼쳐지는 배경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는가 하면 체자레라는 캐릭터의 강렬함에 빠져들게 되고 이야기의 흐름에 압도당하게 된다.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모닝의 역사 속에서도 최고라고 찬사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만화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체자레를 읽으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마르스(MARS)’의 주인공 ‘카시노 레이’의 존재가 어쩌면 영원의 안식처와 체자레의 원점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마르스(MARS)’라는 작품이야말로 소료 후유미에게 있어서 최고의 작품이 아니였을까?

 

 

 

뭐? ‘마르스(MARS)’라고? 할리퀸 로맨스 같은 이야기 전개, 뻔하디 뻔한 클리셰의 집합체 같은 이야기가? 그럴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두 남녀의 이야기는 이미 순정만화에서 수 없이 사용되는 단골손님 같은 소재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극적인 위기는 요시다 아키미의 ‘바나나 피쉬’의 결말을 연상시킬 정도다.(물론 이 작품의 결말은 순정만화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그래서 요시다 아키미의 ‘바나나 피쉬’는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하게 끌려가고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들은 진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료 후유미가 연출해 내는 감성들은 아름답게 부숴지고 하나하나의 파편들이 가슴 깊숙히 파고들어 오며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같이하고 눈높이를 같이하게 된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영혼, 그러나 내면에 깊은 상처는 언제든 부서질 것 같은 유리 같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곁에서 힘이 되고 싶고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장 순정만화다운 정석으로 소료 후류미는 독자들에게 직구를 던진다. 그리고 소료 후유미의 직구를 변화구처럼 길을 잃어버리는 일 없이 독자들의 미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음을 파고드는 소재의 특이함이나 스토리의 구성력, 정교함과는 상관없다. 소류 후유미의 작품이 지닌 가장 단순하지만 강력한 감성의 파편이 자아내는 울림은 조용하게 그리고 묵직하게 마음 속 깊이 자리잡게 된다. 영원의 안식처나 체자레가 그토록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작품의 훌륭함보다 소료 후유미가 던진 묵직한 감성의 파편들이 직구처럼 가슴에 닿았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마르스’에서 키라와 레이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리고 그들의 아픔이 가슴을 적실 수 있었던 것처럼 소료 후유미가 청년지로 연재잡지를 옮겨도 여전히 마르스에서 보여주었던 감성의 조각들로 여전히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카시노 레이가 보여준 불안정한 강렬함은 체자레로 이어지면서 완벽한 강렬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아소 키라의 약하지만 강한 의지는 영원의 안식처에서 가슴 아픈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음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불꽃 같은 삶의 장작들이 다시 한번 타오를 수 있도록 소료 후유미는 마르스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최고의 연출을 보여주었다.( ‘마르스’는 ‘체자레’의 원점이 될 수 없다. 캐릭터 구성이나 이야기의 전개, 사건과 배경 등 어느 것 하나 일치하는 공통의 분모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스의 주인공 레이는 웬지 체자레를 연상시킨다. 체자레가 조금만 더 불안정했다면… 그리고 조금의 빈틈을 보이고 미숙함이 있었다면… 물론 강렬한 카리스마를 잃어버리고 인간적인 체자레가 부각될 수 있었다면 더 이상 ‘체자레’가 될 수 없겠지만…)

 

문득 생각난 ‘마르스’를 꺼내어 다시 한번 책장을 넘기게 된다. 정말 오랜만에 마르스를 다시 읽게 된 셈이지만 놀랍게도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단숨에 빠져들게 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쉴 새 없이 읽어나갔다. 이 작품이 이 부분에서 좋고 이 부분은 아쉽다. 여기는 다소 미숙해 보이는데? 등등… 이런 식으로 작품에 대해 평가할 여유 조차 주지 않는다. 그만큼 ‘마르스’라는 작품은 이성적 판단마저도 흐리게 만들고 감정에 충실하게 만든다. 누군가 ‘마르스라는 작품이 어때요?’라고 물을 때 ‘너무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체자레는 ‘엄청나다.’, ‘완벽하다.’, ‘훌륭하다.’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한다면 마르스는 ‘행복하다.’, ‘재미있다.’, ‘가슴이 울린다.’ 등의 단어를 생각나게 한다. 마음 속 깊이 즐길 수 있는 작품. 순정만화의 진부함마저도 뛰어넘어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