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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야마다군(이웃의 야마다군)의 흥행 실패는 지브리의 미래를 날려버렸고 당시의 지브리의 절반을 날려버렸다. 특히 ‘타카하타 이사오’라는 지브리, 아니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보물 중 하나를 날려버렸기 때문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지브리의 주축이자 양대 산맥으로 함께 해온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존재는 자칫 미야자키 특유의 독선적이고 정형화 될 수 있는 불안정함을 완하시켜주고 오랜 친구이자 파트너로 지브리의 한축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다. 토토로와 반디불의 묘지를 동시 상영하면서 자신의 작품과 상대방의 작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스즈키 토시오와 함께 위태위태하던 지브리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녀의 택급편’의 흥행 대박으로 지브리에게 재정적인 여유를 주었다면 타카하타 이사오는 ‘추억은 방울방울’로 극장에서 흥행 대박을 터뜨리며 재정적 안정과 함께 향후 지브리에 작품에 대한 신뢰와 함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는 큰 Risk를 극복하고 좋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흥행 신화는 미야자키 감독이 92년 ‘붉은 돼지’로 타카하타 감독이 94년 ‘헤이세이 너구리 전쟁 폼포코’로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지브리’라는 브랜드에 신뢰를 심어줌과 동시에 두 작품 모두 전작을 뛰어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면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안겨주게 된다.
95년 ‘귀를 기울이면’은 그 해 일본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하면서 지브리의 숙제까지 해결하게 된다. 이미 고령으로 접어들게 되는 미야자키와 타카하타 이후에 대한 숙제를 ‘콘도 요시후미’라는 또 다른 감독을 지브리의 감독으로 데뷔시켰던 것이다. 물론 콘도 요시후미 감독은 뜻하지 않게 별세하게 되었지만 모치츠키 토모미를 비롯하여 콘도 카츠야 등 외부에서 수혈된 인재들이 지브리에 건재하고 있었고 여전히 미야자키와 타카하타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브리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97년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메’를 발표하면서 지브리는 절정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천문학적인 흥행 수입을 기록하며 일본의 영화 역사를 갈아치웠을 뿐 아니라 ‘지브리’가 구축한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팬들에게 있어서 ‘모노노케 히메’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84년 개봉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뿌리를 내린 후 그 동안 미야자키 하야오가 발표하였던 작품들의 집대성적인 성격을 지닌 미야자키 월드의 연장선이라고 할 정도로 이전과는 특별한 차별점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퓨타의 모험활극이 토토로에서는 현실의 불안정한 캐릭터로 치환되었고 토토로를 일본의 숲 속에 살아 숨쉬게 만들었다. 마녀의 택급편에서는 마녀라는 비현실마저도 일상으로 바꾸어 버린다. 포르코 롯소는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아주 작은 환상을 섞으면서 노스탤지어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낸다. 하지만 모노노케 히메가 도달해야 할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이미 나우시카에서, 토토로에서 도달해버린 지향점에 다시 한번 도달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날지 못하는 아시타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더 이상 날아오르지 않았고, 손과 발이 잘려나가는 장면들은 불필요한 무의미 그 자체였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99년 발표한 ‘이웃집 야마다군’은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재능이였고 지브리가 향후 도전해야만 하는 과제가 무엇인지 해답을 보여준 미래였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흥행실패’로 단정지을지 모르지만 이 작품에서 흥행 대박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작품이다. 4컷 신문만화 원작을 바탕으로 그린 일상의 드라마다. 그 속에서 살며시 미소지을 수 있는 잔잔함, 훈훈하고 따스한 가족의 삶을 극장에서 펼쳐내었다고 해서 무조건 흥행 실패는 아니지만 ‘지브리’라는 이름을 달게 된다면 조금은 달라지게 된다.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보여주었던 극적인 턴어라운드도 없고, 귀를 기울이면에서 펼쳐낸 Boy Meet Girl의 환상적인 추억과 다이내믹함도 없다. 반디불의 묘처럼 감정을 뒤흔들지도 못한다. 그냥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고 우리의 이웃들의 일상이였다. 긴 시간 동안 폭발하는 구성도 없고, 짧막하게 에피소드를 구성한 TV용 홈드라마가 극장으로 옮겨진 것 뿐이다.(물론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보다 디테일하게 살펴볼 때 이 작품은 보는 내내 감탄을 하게 되고 그 잔잔함에 푸근함을 느끼면서 어느 새 잔잔한 감동이 스며들어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새롭고 신선함이 가득한 실험성과 자연스러운 디지털 기법의 극대화, 거기다 음악, 미술 등 애니메이션 제작 전반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타카하타 이사오의 재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흔히 ‘심심한 작품’이라고 부르기에 안성맞춤이였던 것이다.(물론 난 이 작품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큰 액수였던 20억엔이 넘는 제작비가 문제였던 것일까?(하지만 이 정도 퀄리티를 토에이가 아닌 지브리에서 완성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모노노케 만큼은 아니지만 모노노케 때처럼 전방위적으로 마케팅을 펼친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흥행성적과는 별개로 ‘이웃집 야마다군’은 지브리가 이제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연출과 기법은 물론이고 보다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닐 수 있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브리의 작품에 대한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94년 TV스페셜로 발표한 모치츠키 토모미 감독의 ‘바다가 들린다’와 함께 ‘이웃의 야마다군’은 ‘지브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특히 지브리의 다른 작품과는 모든 면에서 새롭고 신선한 모습과 연출을 보이면서 지브리 사상 가장 과감하고 도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투명감 위주의 수채화풍 대신 파스텔풍의 색채, 불규칙적인 외형과 최대한 단순화시킨 배경 등 제작 전반에 걸쳐 디지털 기법을 통해 완성한 이 작품은 일상적인 이야기와는 반대로 연출에 있어서는 실험성이 돋보이는 과감성이 있었다. 특히 움직임에 있어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원작의 영상화를 훌륭하게 연출하였고, 디지털로 재현해낸 아날로그의 느낌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였다. 또한 클래식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던 타카하타 이사오의 취미를 작품 속에서 최대한 발휘하면서 ‘첼로켜는 고슈’처럼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작품 속에 스며들게 연출해 내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다.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서 일본인들에게 삶의 즐거움, 가치, 그리고 행복을 일깨워 주었다. 에피소드마다 하이쿠를 통해 일본인들의 정서를 담아내고 작은 웃음을 선사한다. 하이쿠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있는지 그리고 일본에 하이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시켰다. 신문만화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면서 일상의 드라마가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 주고 현재의 삶 속에서 잊고 살았던 반짝임을 되돌려 주었다. 소소한 가족들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멋진 하루하루인지, 아주 작은 행동에서 미소 짓게 되는 인간미 넘치는 웃음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느끼게 해주었다. 어딘가의 환상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희로애락을 담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험 활극에서 볼 수 있는 다이내믹한 이야기, 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잔잔하게 스며들어오고 깊이 자리잡고 길고 긴 여운을 음미할 수 있는 깊은 맛을 심어 놓았다.
정말로 이웃집 야마다군은 실패작일까? 오히려 이웃의 야마다군을 상업적으로만 평가하면서 실패작으로 몰아붙인 것은 아닐까? 지브리의 틀을 벗어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리고 만 것은 아니였을까?
스튜디오 지브리는 ‘이웃집 야마다군’의 흥행 실패 이후 자사의 작품들을 철저하게 ‘미야자키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야자키 스타일을 가속화하기 시작한다. 타카하타 이사오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버리고 치열한 미야자키의 다재다능한면을 중심으로 미야자키의 의존도를 높여가게 된다. 타카하타 이사오라는 보물을 썩히고 유일하게 미야자키의 색깔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모치츠키 토모미를 떠나보낸다. 토에이 동화에서 디지몬 어드벤쳐 극장판을 통해 역대급의 자질을 보여주었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을 놓치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하울의 움직이는 성’만 봐도 재기발랄한 초반부에 비해 시리어스하게 흘러가는 후반부를 비교해보면 호소다 마모루를 지브리가 놓쳤다는 사실은 뼈아픈 실책임을 알 수 있다.) 모리타 히로유키가 고양이의 보은에서 보여준 재능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브리는 타카하타 이사오의 일상 대신 미야자키 하야오의 환상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관성의 법칙은 지브리의 브랜드를 유지시켜 주었지만 결국 지브리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었다. 흥행성적을 떠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비교해 볼 때 그 정도는 더욱 심각하다. 가장 최근에 발표하였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지브리의 절규처럼 들렸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낙오한 지브리가 과거의 영광 속에 빠져서 자신들의 방식을 왜 찬양하지 않는가를 설명하는 작품 같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포스트 미야자키’를 걱정한다. 하지만 진실은 포스트 미야자키가 아니라 ‘포스트 타카하타 이사오’였던 것이 아니였을까? 물론 흥행작은 타카하타가 없어도 가능하다. 하지만 타카하타 이사오가 만들어내는 현실은 타카하타 이사오의 연출력이 아니면 힘들다. 언제까지 미야자키식 일편단심에 매달릴 것인가?(미야자키의 작품은 언제나 소년은 소녀와 일대 일로 매칭 된다. 타카하타는 일편단심, 이편단심^^;도 가능하다.)
지브리의 목표가 언제부터 흥행작을 만드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인가? 어디에서도 자랑할 수 있을 문한 훌륭한 작품을 훌륭한 제작 환경에서 만들고 싶었던 것이 지브리의 설립 이유가 아니였던가? 돈이 필요하다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흥행 성적이면 제2의, 제3의 이웃의 야마다군을 제작했어도 무리가 없었을 텐데?
타카하타 이사오는 ‘카구야공주이야기’를 통해 14년만에 현장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이미 타카하타 이사오는 우리나이로 78세(1935년생)다. 그리고 흥행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리고 타카하타 이사오는 재미있는 작품보다는 훌륭한 작품에 대한 인식이 강한 감독이다.(그런 점에서 스스로 지루한 작품을 만드는데 자신 있다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배짱은 대단하다.) 왜 하필 이제서야? 한 때는 흥행의 보증수표였지만 이제는 미야자키 만큼의 흥행력은 보여주지 못했는데?
한가지만 바란다.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품이 미야자키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미야자키식 작품이 아니라 타카하타식 작품이 지브리 안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번에도 매너리즘에 빠진 작품을 들고 나온다면 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을 현역 감독 중에서는 최고의 위치에 놓고 싶을 것이다.(그래도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감독은 사토 준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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