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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감사의 말을 하게 된다면? 바로 ‘위대한 개츠비’를 알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하루키가 선사한 최고의 낚시다.’ 이 말에 난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싶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에서 언급한 대로 ‘위대한 개츠비’는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위대한 제이 개츠비의 이야기이며, 초라하게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제임스 개츠의 삶 속에서 시대의 그림자를 담아낸 피츠제럴드가 들려주는 최고의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목표는 위대하였으나 과정은 그렇지 못했다. 화려한 파티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장막들이 하나 둘씩 벗겨지고 제이 개츠비가 아니라 제임스 개츠로 변해가면서 개츠비의 화려함은 퇴색되어 그 빛을 잃어버린다. 정말로 개츠비는 위대한 것일까? 닉 캐러웨이는 정말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역설적으로 사용했던 것일까? 개츠비의 화려함에 가려질 수 밖에 없는 개츠비의 맹목적이고 순수한 모습들을 생각할 때 과연 개츠비의 삶은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적 기준으로 개츠비를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지금도 다양한 형태의 물음표를 던져주는 반면 정답은 알려주지 않는다.

미국이 화려한 시대의 빛을 뒤로하고 대공황의 시대를 맞이하듯 매일 밤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의 가운데에 위치하는 개츠비의 삶 역시 미국의 모습과 일치한다. 동시에 제이 개츠비의 모습은 피츠제럴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츠제럴드의 사랑이야기, 피츠제럴드의 문학이야기, 그리고 피츠제럴드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피츠제럴드식 소설의 결정체다. 이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는 이유가 전자에 있다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는 이유는 후자에 있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묘사는 화려하다. 여러 가지 형형색색의 꽃들이 장식되어 있는 듯 피츠제럴드의 문장들은 감각적이고, 마치 영상언어와도 같은 마법을 지니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를 감상하는 내내 피츠제럴드의 단어들이 자아내는 화려한 연출 속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작품의 세상 속으로 빠져든다면 역시 피츠제럴드가 들려주는 개츠비의 사랑이야기다. 화려한 재즈시대의 찬란함만큼이나 피츠제럴드의 문장 역시 화려한 빛을 발산한다. 시대의 그림자는 이 같은 화려함 속에 묻혀질지도 모르지만 개츠비의 사랑이야기만큼은 어떠한 빛에도 물들지 않고 변함없이 위치하고 있다. 작품을 읽으면서 또는 작품을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재즈 시대의 화려함이나 피츠제럴드의 감각적인 언어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맹목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제이 개츠비의 모습을 각인시킨다.

위대한 개츠비의 이야기는 초라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남아 있는 개츠비의 모습은 초라한 제임스 개츠가 아니라 제이 개츠비의 이야기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때문에 ‘Great’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분명 과거형으로 사용되어야 할 단어지만 작품 밖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피츠제럴드가 들려준 가장 Geat한 이야기, 그리고 피츠제럴드가 만들어낸 가장 Great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독자는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