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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는 ‘제이콥의 방’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의 방향을 정하고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구체적으로 완성되어 자신만의 작품 스타일을 확립하게 된다. 이후 ‘등대로’를 거치며 한 층 더 성숙되고 고차원적으로 완성되었던 그녀의 작품스타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는 실험성을 통해 자신만의 문학적 완성을 이루게 된다. 특히 형식면에서는 시와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내용면에서는 삶의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돋보였던 ‘파도’와 태고적부터 현시대까지의 시간적 흐름을 야외극의 단편적 이미지로 구성하여 운문과 산문, 소설과 희곡의 형태를 하나의 문학으로 구현하였던 ‘막간’은 울프의 작품 세계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울프는 잠시 쉬어가고 싶었던 것일까? ‘등대로’와 ‘파도’ 사이에 ‘올랜도’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을 보여준 환상소설과 전기소설의 중간적 성격을 발표한데 이어 그녀의 유작 ‘막간’에 앞서 ‘세월’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녀의 실험적인 시도는 잠시 쉬어가게 된다.
‘세월’에서 울프는 새롭고 혁신적인 특별한 시도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까지 그녀가 보여왔던 서술 기법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한층 성숙해진 형태로 완성하여 모더니스트로서의 울프가 아니라 문장과 문체의 아름다움을 통해 소설가 울프의 매력이 무엇인지 확인시켜 주었다.
‘세월’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내면의 의식과 외면의 대화, 다양한 외적 묘사와 특유의 빛나는 감각적 이미지화를 통해 울프가 만들어낸 단어의 아름다움, 문장의 유려함을 한 층 더 돋보이게 하였다. 전작들을 통해 울프의 실험이 다소 파격 또는 혁명적인 모습을 보여왔다면 ‘세월’에서는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여유마저 느껴진다. 서정적인 문체와 풍부한 감성이 만들어내는 묘사를 통해 다가오는 특유의 감수성은 곳곳에서 반짝임을 지니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작품 속 아무 페이지를 펼쳐도 반할 수 있도록 문장과 단어의 매력을 살리고 있다. 단어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리듬감과 곳곳에서 느껴지는 시적인 감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묘사는 물론이고 유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세월의 흐름, 거리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도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일상의 단면들을 조용히 그려나간다. 역사적인 사건(전쟁과 같은)마저도 최소한으로 체감하도록 일상의 삶 속에 녹여내어 작가가 서술하는 삶의 단편적인 이야기들과 대화들은 내면의 의식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특히 다양한 인물들의 의식의 세계를 무한하게 펼쳐나가면서도 외적인 묘사나 대화를 함께 펼쳐나가며 작품의 느낌을 극대화시키고 독자들로 하여금 울프의 서술이 자아내는 마법에 흠뻑 빠져들게 하였다. 1980년부터 현재(1937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일어나는 파기터 가족과 친척들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 속에 다양한 일상이 함께 하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과거의 추억들을 통한 그리움과 향수를 자극한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파기터 가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파기터 가족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앨리너와 함께 눈높이를 맞추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작품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자신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고 다시 한번 가다듬어 마지막 문학적 완성을 위한 휴식처로 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삶을 회상하고 추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기억의 심상들을 통해 그리움 속에 빠져들고 싶었던 것일까? 현재의 모습 속에 지난 날의 흔적들을 겹쳐보자. 특별히 대단한 사건도 아니고 자랑할만한 것도 아니지만 삶이라는 형태 속에 깊이 내포되어 있는 소중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그녀의 실험성과 문학적 세계가 아니라 꾸밈없는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삶 속에서 평범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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