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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sungjin 2012. 4. 16. 13:17



학급의 세력 판도를 통해 대한민국의 상황을 압축된 현실로 묘사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사회의 거울로서의 가치와 문학이라는 본질적인 즐거움, 그리고 이문열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더해지면서 마지막까지 손을 떼기 힘든 작품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특히 자유당 시절, 공화당 시절, 민자당 시절을 통해 가리워져 있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겹쳐지면서 소설이라는 형식의 문학이 지닌 시대의 반영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호평 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작품의 외적인 논란 외에도 기타 여러 가지 논란거리를 남겼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작품의 가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논란 거리 등은 잠시 접어두고 싶다. 아래에 계속해서 이야기 하겠지만 지금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다른 분야이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이 작품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굳이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었고, 이문열이 의도한 것 이상의 가치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이 작품이 발표 된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통해 또 다른 재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이후에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다양한 연구매개체로 끊임없이 연구될 것이다. 작가 이문열+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국적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이 이 작품의 문학적 영원성을 획득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작품의 외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이 작품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면 어떨까? 특히 학원물로 이 작품을 분류하였을 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과연 어떤 식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한 학급이라는 압축 된 공간이 아니라 작품의 무대인 학교의 한 학급의 이야기, 그리고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엄석대의 이야기, 대립관계에서 수직적 상하관계로 위치 이동하게 된 주인공 한병태의 이야기, 새롭게 부임한 선생님의 등장으로 무너져 버린 석대왕국의 이야기를 감상한다고 할 때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어떠한 즐거움을 줄 수 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접했을 때 이 작품은 어떤 식으로 다가오게 될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야기는 전통적인 학원물의 클리셰를 교묘하게 비틀어 놓았다.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이 차례차례 라이벌들을 무너뜨리고 학교를 정복하는 이야기도 아니라 결국 굴복할 수 밖에 없었고 불의에 대해 정의감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쓰려뜨려야 할 상대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선생님에 의해 쓰러지고 만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이야기는 전통적 학원물이 갖추고 있어야 할 소재를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르게 배열하고 전개해 나간다. 물론 이 작품은 청소년 소설이 아니다. 때문에 이 같은 소년물 같은 이야기구성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 잘못된 접근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세대가 소년층까지도 확대시킬 수 있다고 가정하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충분히 청소년 세대, 아니 그 이하의 세대에게까지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식의 접근도 괜찮지 않을까?(이문열의 작가적 역량이 대단한 이유는 그가 가진 필력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강력한 재미의 힘을 보여준 작가라는 것이다. 특히 마음만 먹으면 세대 구분 없이 모든 연령층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작가라는 것이다.) 때문에 작품의 외적 요소를 배제하고 독자층을 한정시킬 때 이 작품은 또 하나의 학원물의 클리셰 브레이커가 될 수 있고 이 때문에 학원물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또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과거의 향수를 짙게 드리우며 지난날에 대한 감성을 자극한다. 지금의 학생들은 경험하지 못한 낯설기만 한 아이템과 배경은 과거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추억의 상자를 열게 만들었고 현재의 독자들에게는 빛 바랜 이야기를 경험시켜주었다. 마치 자연스럽게 비디오테입이 재생되는 것처럼 작가는 생동감 넘치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들려주며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로 하여금 어떠한 이질감이나 거부감 없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시절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문열의 작가적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학원물의 컨셉을 차용하면서 어른들의 이야기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이야기로 확장시켜 들려주는 한편 철저하게 한정 된 공간 안에서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도 독립적인 형태의 학원물의 재미를 한껏 살려내고 있다. 주인공의 모습과 함께 하며 숨죽이고 지켜볼 수 밖에 없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는 기억을 자극하여 끌어낸다.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다. 작품에 숨겨진 의도나 주제를 파악하고 디테일하게 분석하고 사유를 끌어내기 이전에 보다 쉽게 다가올 수 있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의 즐거움이 있다.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구분 없이 각자의 환경에서 취할 수 있는 만큼의 즐거움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서 작품을 즐기는 것은 어떨까? 독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즐거움이 있을 때 그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