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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서…”

 

이시구로 가즈오의 파묻힌 거인이 선사하는 환상은 묵직하고 흥미롭다. 환상소설이 일반적으로 지니기 쉬운 자유로운 상상의 세상 속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조용하게 숨죽이며 한발한발 걸어나가는 듯한 답답함이 담겨 있다. 환상소설이 지닐 수 있는 장점 중 하나인 화려함대신 사색적으로 흐르는 듯한 사고의 호수 밑바닥까지 깊숙하게 가라앉혀 놓고 독자들을 끌어올리는 듯한 느릿느릿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묵직하게그리고 이 묵직함을 조금씩 조금씩 작품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매력으로 만들어 간다. 좀처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게 된다. 묵직한 이야기의 힘은 특유의 환상과 함께 마지막까지 독자들에게 물음표를 지니게 하고 있었고, 이야기의 힘은 우리의 삶 속에 동일하게 투영될 수 있는 현실감을 지니게 되면서 단순히 소설이 아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삶의 영역을 공유시켜 주고 있게 되었다. 함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색의 깊이가 작품에서 나와 독자들의 머리를 일깨우고 가슴을 흔들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망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망각을 만들어 내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망각에 의지하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 역사는 얼마나 거대한 망각장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망각의 세상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잊어버릴 수 있지만 반대로 행복과 기쁨도 함께 잊어버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삶이고 인류의 반복되는 역사이기도 하다. 수많은 갈등에 부딛히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망각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단순히 소설의 가장 큰 사건이 될 수 밖에 없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장치에 그치지 않고 왜 망각이라는 주제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지를 되새길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용과 기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무거울 수 밖에 없는 과거를 가볍게 만들어 버리고 슬픔으로 다가올 현재를 기쁨으로 포장할 수 있다. 불행할 수 밖에 없는 미래마저도 희망으로 채울 수 있는 망각의 힘을 작가는 책속에서 환상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감추어진 과거와 거짓된 진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잊게 하면서 완성 된 인위적인 평화의 모습 속에서 현재 이 망각으로 유지되는 세상이 정말로 나쁜 것인지, 옳은 것인지에 대해 한 순간 고민하게 만든다. 결말을 향해가는 선택지는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음에도 독자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고 망각이 만들어낸 삶의 모습, 역사의 모습을 투영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겹쳐서 바라보게 된다.

 

수수께끼, 퍼즐, 액션, 특히 자유로운 상상력이 마음껏 펼쳐질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이 같은 요소들을 제한하고 한정 된 공간과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하는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겹쳐질 수 밖에 없게 하였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전하고 있었던 것들을 명쾌할지 몰라도 다가오는 무게만큼은 묵직하게 완성하였다. 마지막까지 시선을 잡아둘 수 밖에 없는 독특한 매력을 담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