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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칼잡이들의 이야기

sungjin 2013. 4. 1. 12:22



작가칼잡이들의 이야기(브로디의 보고서)’로 구성되어 있는 보르헤스 전집의 네번째 단행본은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지적압축의 힘을 배제하고 환상적인 요소를 약화시켜 조금은 쉬어갈 수 있는 이야기들로 구성하고 보르헤스의 힘을 증명시켜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도저히 풀수 없는 수수께끼들로 가득 채우고 혼란스러움의 극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으며, 학문의 극한에서 이해는 커녕 읽어나가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 수 있는 작가지만 픽션들-알레프에서 보여주었던 환상과 학문의 압축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대신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을 통해 보르헤스의 단편이 지닌 경이로움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인 이야기의 흐름 대신 기록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작가에서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취하는 대신 특정한 페이지를 발췌하여 자신의 생각들을 삽입시키거나 특정의 주제를 통해 이야기라기 보다는 사고에 가까운 기억의 단편 또는 역사의 페이지 같은 느낌으로 독자들에게 특이함을 경험시켜준다. 실제의 역사적인 배경과 인물, 사건들을 중심으로 단편의 기본 설정을 구성하고 작가의 의도적인 오류나 허구 또는 장난질을 섞어서 역사의 반복되는 순환구조를 그려나간다.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패러디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하기도 하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편집한다. 반복되는 사건들을 기억하고 다시 배치하여 플롯과 스토리의 완성보다는 끊임없이 생각해오고 물음을 던져야만 했던 테마들을 나열한다. 반복되고 순환되는 이야기 중간 중간 작가 특유의 환상적인 단편이 삽입되면서 작가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는 단편들은 하나의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언어가 드러내는 지적압축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짧은 글들로 완성된 각각의 단편들(단편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을 통해 보르헤스의 단편이 지닌 경이로움의 또 다른 재미를 전해준다.

 

단행본의 후반을 차지하고 있는 칼잡이들의 이야기에서는 환상은 더욱 약해지게 된다. 물론 보르디의 보고서와 같이 보르헤스가 선사하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단편의 즐거움을 담은 단편들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또 다른 보르헤스 단편의 매력을 전해준다. ‘대결이라는 모티브로 묶을 수 있는 각각의 단편들은 문헌적인 느낌, 생각을 담은 에세이 또는 사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편집하고 구성한 기록의 형식을 지닌 작가와는 달리 사건을 담은 이야기들을 펼쳐내면서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와는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도 보르헤스의 단편이 지니고 있는 선선함과 경이로움을 전해준다. 대결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꿈과 현실, 사람과 도구, 기억과 망각 등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결투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사상과 사고의 부딪힘이다. 그리고 이 같은 결투들은 또 다른 결투들을 낳게 되고 다음 결투로 이어지며 반복과 순환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단행본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에서 느낀 익숙하지 않음이 지적압축으로 표현된 언어들의 집합체인 단편들의 접근성을 어렵게 한다면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칼잡이들의 이야기다소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접근하기 어렵다. 읽을수록 생각이 복잡해지게 되고 각각의 단편들을 묶어서 해석하면 더더욱 복잡해지게 된다. 그렇지만 보르헤스의 작품은 그 이상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놀라움과 즐거움이 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독서의 즐거움, 공략하기 힘들지만 경이로움에 조금씩 접근해갈 때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은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