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NOTE

정체성 by 밀란 쿤데라

sungjin 2013. 2. 20. 16:43



정체성’을 읽으면서 특징적인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 중 하나는 모호함 일 것이다. 특히 어떠한 단어를 규정함에 있어서 사전적인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감성적인 단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이 때 사용되는 단어는 관념적이고 모호하다. 마치 시와 같은 함축성을 지니면서 생각의 우물을 끌어올리게 만든다. 소설을 진행함에 있어서 명확하게 구분되고 확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이미지들을 텍스트로 추상화시킨다. 때문에 큰 사건이나 풍부한 이야기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이라는 소설은 풍부하게 느껴진다.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박자 쉬어가게 된다. 이 같은 모호함은 ‘정체성’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의해서 소설의 느낌을 완성해 나간다. 그리고 이 것은 ‘정체성’이라는 작품 속 인물과 작품만이 아니라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정체성으로 확장되어 받아들여지게 된다.

 

작가는 정체성이라는 타이틀을 작품에 붙이면서 정체성이라는 단어에 묶여 버리도록 만든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로 요약되는 이 작품은 시라노의 쿤데라식 패러디다. ‘정체성시라노에서자신이 쓴 편지로 인해 탄생 된 가상의 분신에 질투심을 가진 남자 주인공과 익명의 편지를 받고 불쾌함으로 시작된 감정에 묘하게 끌리게 되는 여자 주인공이 펼치는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는 시라노의 웃음과 슬픔, 기쁨과 행복, 불행의 감정이 살아 있지만 쿤데라의 정체성이 지닌 무거움과 진지함, 사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짧게 짧게 이어지는 챕터로 끊어지도록 구성하였다. 쿤데라 특유의 음악적 리듬감을 소설을 통해 연출하면서 단숨에 읽어나가는 속도감 넘치는 재미있는 소설이 아니라 한 템포씩 쉬어가다 가끔은 빨리 달려갈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있는 재미있는 소설로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소설보다 풍부하게 생각의 장을 마련하고 시의 함축성과 메타포 등의 압축성과는 차별되는 다성적인 형태로 정체성의 짧은 이야기를 띄워놓고 가볍게 읽으면서도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게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지적인 피곤함이 아니라 상쾌함을 남기는 타이밍 감각과 유머러스함을 곳곳에 배치하면서

 

한층 더 발전 되고 과감해진 쿤데라의 실험적인 서술은 또 다른 소설의 영역을 찾아내고, 소설이 가진 경쟁력과 잠재된 가치를 보여주었다. 일반적인 쉼표나 마침표에 콜론과 세미콜론을 문장에 적용하여 순간의 의식의 흐름이나 환기 또는 동시적이거나 지속적인 흐름을 서술한다. 수학에서 사용되는 등호나 화살표 대신 문장에서 사용되는 콜론과 세미콜론으로 순간적인 현재를 잡아두고 의식의 미묘한 흐름(시점의 흐름, 대화의 흐름, 묘사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나, 만화 같은 인쇄매체를 통해서는 좀처럼 재현하기 힘든 소설만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정체성은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얇지만 깊다. 짧지만 길다. 하나의 특정한 규격이 아니라 모순되는 이미지들의 경계를 넘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오직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르는, 그리고 쿤데라이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일 수 밖에 없는 형태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