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NOTE

느림 by 밀란 쿤데라

sungjin 2013. 2. 18. 11:56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느림이라는 소설의 분량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때 긴 분량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장편 소설 치고는 상당히 적은 분량이다. ‘느림을 읽어나가는 시간 또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리게 진행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게 되고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고 싶어진다. ‘느림이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독서의 즐거움이 함께 하는 것이다.

 

느림의 이야기에는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소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 인물, 사건, 배경을 위주로 전개해 나가지 않고 외적인 화자의 액자 속 이야기와 또 하나의 액자식 이야기를 병치시켜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짜여진 이야기 대신 각각의 세 개의 이야기들-18세기 기사의 우스꽝스러운 불륜, 20세기 춤꾼(정치가 등)들의 우스꽝스러운 도덕씨름과 삶의 단면들, 마지막으로 소설의 주인공이자 소설가 자신의 분신으로 두 개의 삽입 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소설가의 하루-을 전개해 나간다. 각각의 이야기는 소설가에 의해 액자식 이야기의 경계를 걷어버리고 시점을 혼재시키며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소설 속 인물들의 시점이 연결되고 장면이 이어지면서 이야기의 일부가 겹치게 되고 반복되면서 쿤데라식 사색의 호수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소설의 무대는 모호하고 사건의 중심은 약해진다. 쿤데라의 사색적인 단어들과 문장들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소설의 성격은 희석되고 에세이의 느낌에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인물과 사건의 중심이 약해지고 배경이 모호해지면서 이야기의 밀도는 낮아지게 되고, 쿤데라 특유의 사색적인 호수 속으로 빠져들면서 템포는 느려지게 된다. 천천히그러나 깊이 음미할 수 있는 느림의 즐거움이 함께하기 시작한다. 작가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예술이라는 것이 도덕적인 감옥에서 해방시켜 준다면 이 소설은 시간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있는 현대인들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간의 흐름에 반비례하는 기억의 샘을 강조하며 빠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망각을 극복하기 위해 느림을 통해 기억되도록 한다. 이야기의 밀도는 낮지만 사고의 밀도는 높은 쿤데라의 작품은 느림으로 치환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소설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하였고 느리게 읽어나가도록 호흡을 조절하며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소설을 완성하였다.

 

텍스트로 구성 된 소설의 특이성, 과감한 시도와 실험적 연출과 서술로 이어지는 난해함, 특유의 위트 넘치는 문장과 센스, 그리고 언제나 함께하는 에로티시즘은 쿤데라의 작품의 공통적인 즐거움이다. 특히 사색적인 이미지들로 채운 에세이적인 느낌은 쿤데라의 소설이 지닌 최고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특히 느림을 읽으면 취해버릴지도 모르겠다. 느림의 즐거움을 소설 그 자체로 완성해내며 쿤데라의 소설이 주는 즐거움과 느림이 주는 즐거움이 함께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