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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소설가로서의 자신은 자신이 쓴 소설의 그림자 속에 감추어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같은 바램이 이루어지기는 무리였던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쿤데라의 필모그래피가 자연스럽게 겹쳐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읽으면서 쿤데라의 그림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가정은 무의미 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쿤데라의 아이덴티티와 오리지널리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쿤데라의 그림자를 걷어내기란 불가능이 아닐까?

 

한 시인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는 생은 다른 곳에(삶은 다른 곳에)는 쿤데라의 자전적 삶이 녹아 들어간다. 쿤데라 자신의 삶의 궤적과 일치시킨 것은 아니지만 쿤데라의 삶과 주변 환경, 쿤데라를 둘러싸고 있던 이데올로기들이 배치되어 있다. 시인으로서의 감성과 재능을 깨달아가고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을 그려나가는 이 작품은 교양 소설 또는 성장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 시인의 생애를 담은 전기소설의 흐름성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수없이 접해왔던 소설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이름이 들어가면서 이 작품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바뀌게 된다. 쿤데라의 마법에 의해서

 

예술은 그 원천이 이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경직 된 세상에서 자아의 확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함으로 독자들을 사로잡고 대중성을 위해 자신의 작품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시간의 혼재, 시점의 교차 등 실험성 짙은 서술을 선보이면서도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 어려운 작품이 아니라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함으로 다가오게 한다. 만만치 않은 분량 속에 실험성을 넣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 다양한 배경들을 섞어서 끊임없이 사고하게 만드는 쿤데라 특유의 문장들을 쏟아내면서도 책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마법을 선보인다. 즉흥적으로 전개되는 내용의 이면에는 치밀하게 구성 된 소설의 기술이 있다.

 

쿤데라가 자신의 그림자를 소설 속에 감추기에는 아직은 부족하지 않을까? 작품 곳곳에서 쿤데라의 스타일이 넘쳐흐른다. 생각의 강 속에 빠뜨리고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고, 모호한 문장을 통해 소설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나간다. 특유의 위트넘치는 유머 감각과 탁월한 센스를 통해 전해오는 이미지들은 오직 소설, 특히 쿤데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느낌들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결국 작품을 읽으면서 마지막까지 남게 되는 것은 한 시인의 성장 과정,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눈뜨고 확립하는 과정,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부딪힘이 아니라 쿤데라스러운 웃음과 사색적인 문장의 느낌이 남게 된다. 아마 작품의 외적인 정보를 최소화하고 오직 소설만의 독립적인 세계를 그리더라도 쿤데라의 그림자는 소설 속에서 감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