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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반 컬라이더스코프

sungjin 2008. 4. 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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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 Kaibara/Hiro Suzuhara/SHUEISHA/학산문화사

소설의 장점은 텍스트만으로 음악적 감각을 살려낼 수 있고 영화를 보는 듯한 영상미를 이미지화 시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정화된 문자로 이루어진 소설이 표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이유도 텍스트가 가진 한계를 넘어 수많은 감각을 표현해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포츠를 소재로 한 소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단순히 스포츠라는 경기에 초점을 맞추고 플레이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화려함과 투혼 열정을 담아낸 소설은 더더욱 찾기 힘들다. 그만큼 스포츠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상 텍스트로 순간의 긴장과 흥분, 스포츠 특유의 뜨거운 드라마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상의 드라마에서부터 상상력의 환타지, 그리고 방대하면서도 디테일한 이론과 지식으로 충만 된 SF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거의 모든 장르에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해 오고 있지만 오직 스포츠라는 영역에서만큼은 소설이 넘지 못한(어쩌면 넘어설 수 없는) 불모지가 아닐까?

은반 컬라이더스코프는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는 본격 스포츠 소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다른 매체에서조차 좀처럼 보기 힘든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소재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또 다른 영역의 가능성을 개척해 내었다고까지 평가할 정도다.

야구나 축구처럼 대중화된 스포츠와는 달리 피겨 스케이팅은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홈런이 무엇이고 골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플레이가 펼쳐지고 경기의 흐름과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대중적인 스포츠의 경우 텍스트로 표현할 때 독자들의 이해가 쉽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인기스포츠를 소재로 한(야구나 축구를 소재로 한 소설은 많지만 실제 경기를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소설이 극히 드문 이유는 스포츠 경기 중 벌어지는 플레이의 리얼함과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현장감을 극복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만화라는 매체가 특유의 과장이나 시각적 연출의 극대화를 통해 이 같은 단점들을 상당부분 극복해 내는 반면(동시에 이것은 상대적으로 만화라는 매체에서 스포츠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스포츠가 가지는 매력을 완벽하게 전달해 내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피겨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은반 컬라이더스코프의 경우는 어떨까? 일시적 유행이나 스타 플레이어의 등장으로 피겨 스케이팅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생길지 몰라도 피겨 스케이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설령 텍스트만으로 완벽하게 묘사해 낸다고 하더라도 기술의 명칭과 난이도 경기의 흐름과 채점방식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한다면 드라마가 죽어버린 채 해설서와도 같은 소설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 피겨 스케이팅처럼 객관적인 지표에 따라 승패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경기가 아니라 사람의 눈을 믿고 예술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기, 거기다 음악이라는 청각적인 요소와의 조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연기를 이해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칫하면 나열에 그친 반쪽짜리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피겨 스케이팅의 매력을 훌륭하게 전해줄 수 있었다. 피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보자들에게 피겨 스케이팅의 대한 이해를 돕기보다는 피겨 스케이팅 그 자체의 매력을 전달해 내는데 집중하고 드라마를 살려내며 본격 피겨 스케이팅 소설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좀처럼 보기 힘든 텍스트로 이루어진 스포츠 소설을 탄생시켰다.

클래식 음악의 제목을 모르더라도, 기술의 명칭이 무엇이고 어떻게 펼쳐지는지 모르더라도 매력을 훌륭하게 묘사해 내고 있었다. 통통튀는 생동감, 긴박하게 흐르는 흥분감 등 어떤 이미지, 어떤 느낌인지 머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느낀다. 은반의 링크 위에서 벌어지는 열정과 꿈 등 스포츠의 매력이 흠뻑 담겨 있다.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정신적 기술적으로 성장해 가는 즐거움,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 보다 성숙해 지기 위해 한걸음 물러서는 때를 알고 순간의 긴장감과 안도감, 환희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묘사해 내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할 수 있는 긴장감, 절대 강자가 등장할 때 느끼는 박력과 카리스마, 고요하게 울려펴지는 은반 위의 은은한 느낌,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과 함께 정적으로 흐르는 동적인 생동감이 조화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점프할 때의 약동감이 살아 있는 느낌으로 전해질 정도로 피겨 스케이팅의 매력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같은 피겨 스케이팅의 매력, 보다 근본적으로 스포츠라는 소재가 가지는 매력, 스포츠 자체가 가지는 매력을 주인공의 드라마에 자연스럽게 위치시키며 이야기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다양한 사건들, 상황, 주변의 인물들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소설 특유의 깊이 있는 내면의 심리묘사는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높여주었다. 매 에피소드마다 깔끔한 마무리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발랄하면서도 톡톡 튀는 느낌이 가득 채워져 있다. 때로는 아기자기함이 돋보이는가 하면 어떤 때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웃음이 있다. 스포츠 특유의 뜨거운 감동이 있는가 하면 드라마틱한 잔잔한 여운이 남기도 하며 깊은 감동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재미와 감동, 웃음과 여운이 함께 하며 소설로서의 본질적인 재미를 잊지 않고 있다.

캐릭터의 매력도 놓칠 수 없는 요소다. 다양한 트렌드와 속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캐릭터설정은 캐릭터 자체만으로도 팬들의 마음을 끌 수 있지만 작품의 분위기에 딱!맞는 이미지와 스토리에 녹아 들어가면서 그 매력을 한 것 발상하고 있으며, 스즈하라 히로의 환상적인 일러스트는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 시켰다.

텍스트만으로 이렇게 피겨 스케이팅의 매력을 살려낸 작품은 좀처럼 접하기 힘들 것이다. 동시에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소녀의 성장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 참신하게 표현 된 감각이 살아 있는 은반 컬라이더스코프는 스포츠 특유의 재미, 드라마의 재미와 톡톡 튀는 캐릭터의 재미가 함께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