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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비천무

sungjin 2008. 2. 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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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린/대원씨아이

김혜린은 비천무를 발표하면서 두번째 장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순정만화계의 트렌드나 방향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작가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며 이는 이후 김혜린의 작품 세계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일시적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자유롭게 그려낸 비천무가 이후 수차례 복간되고 영화로, 드라마로 미디어믹스 되며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당시로서는 그려내기 힘든 순정만화의 무협적 소재와 대담한 구성, 거대한 스케일의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흘러가는 사랑이야기가 작가의 손에 의해 열정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작품으로 세상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무협물과는 다른 작가의 감수성이 녹아 있다. 무협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살려 액션에 치중하기보다는 애절한 남녀간의 사랑과 어긋나면서 틀어지는 왜곡된 감정들을 가슴 아프게 풀어나가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화려하고 눈돌릴 틈 없이 펼쳐지는 무공의 향연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 욕망과 사랑, 애증과 간절함 등 수많은 감정들을 작품 속에 교차시켜 나가며 드라마의 힘을 실어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고 중량감을 심어주었다. 특히 원나라 말기 시대적 격변기를 무대로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안에서 시대적 민중들의 삶과 한을 담은 정서는 김혜린이라는 작가의 재능을 확인시켜 주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과 억압받고 탄압받던 민중의 한이 서린 비천무는 내용뿐 아니라 표현에서도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순정만화 특유의 감성적인 연출이 작품을 감싸면서 작품의 진행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시, 동양적인 선의 미학과 동양적 배경이 자아내는 이미지의 선율들은 비천무라는 작품의 무대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다.

무협이라는 소재를 가져오면서도 순정만화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자칫하면 무협이라는 소재로 인한 장르적 특성에 먹혀 어중간한 입장에서 어느쪽의 팬들도 납득시키지 못한 채 실망감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김혜린은 자신의 작품에서 무엇을 중요시하고 어떤 의도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동시에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만이 아니라 이들을 중심으로 원나라 말기의 시대의 큰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위치시켰다.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비천무가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