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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기사단장 죽이기

sungjin 2017. 7. 20. 12:39


관성의 법칙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때마다 매번 같은 소리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여러가지 의미로 신선하고 놀라움이 가득하지만 반복되는 변주곡에 어느 새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나면 어느 새 하루키의 소설은 습관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독서생활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성의 법칙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신작이라기 보다는 변주곡 같은 하루키의 소설을 반복해서 읽는다는 느낌이 들어도 특별히 관성이라는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 특유의 현학적인 이미지가 자아내는 신비로움이 매혹적인 문장들의 바다 속에서 지속적으로 중독될 수 밖에 없는 하루키의 소설은 결국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길 수 밖에 없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다음 작품에 대한 즐거움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1Q84를 읽었을 때에도, 여자없는 남자들을 읽었을 때에도, 그리고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작품에 대한 느낌은 동일하고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소설이라는 형태에 대한 잠재성을 하루키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래도 기사단장 죽이기는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변주곡이지만 스토리적으로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서 독자들에게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2000년 이후의 하루키의 소설을 생각한다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알면 알수록 기사단장 죽이기의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매듭이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루키의 소설은 ---또는 ---처럼 이라는 매듭이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작품을 음미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고전 속의 모티브를 바탕으로 현실과 환상, 그리고 섹스라는 키워드를 배치하면서 이데아와 메타포라는 현학적인 이미지를 소설 속에서 구현해내는, 아니 오직 소설로밖에 구현할 수 밖에 없는 하루키 월드는 열린 결말을 통해 잠재성을 더욱 확장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지닌 환상은 현실과 만날수록 더욱 강력해지고 명확해지지만 반면 하루키의 소설이 지닌 현실은 환상과 만나면서 더욱 모호해지고 흐릿해지기 때문에 매듭이 만들어지는 순간 이 밸런스는 불안정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는 매듭을 지었다.(물론 곳곳에 매듭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는 즐거움이 다채로워진 듯하다. 소설을 읽기 전에 기대하지 않았던 상쾌함이 느껴진다. 몇 년 후의 후일담이 담긴 에피소드까지 곁들이면서 전통적인 결말마저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새로움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야기의 매듭을 짓는 것이 당연함에도 하루키라는 단어가 반복될수록 어색함이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결말이 지금에 와서는 매력적인 하루키 소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키니까

 

언제나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단어, 질릴 정도로 남발할 수 밖에 없는 단어로 마무리 할수 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이지만 하루키의 소설에 익숙해져 있는 분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도 보다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넘치는 작품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