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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인랜드

sungjin 2016. 9. 17. 13:39


토마스 핀천의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적인 배경 지식도 필요하지만 작가가 작품 속에서 설정한 시대적 배경, 특히 미디어 전반에 걸친 잡학다식함 역시 필수적이다. 때문에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사회가 만들어낸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하나씩 흘러나오는 다양한 배경지식을 깔지 않으면 작품에 대한 본질적인 재미를 느끼는 것이 어렵다.

 

바인랜드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토마스 핀천의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다시 한번 토마스 핀천의 작품을 즐기기는커녕 이해하는 것조차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60년대 히피문화의 반항적 스타일과 80년대 레이건의 시대의 대비를 통해 표현되는 미국 사회의 단면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작품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요소는 오랫동안 헤어진 가족이 만나게 되는 가족 드라마였다.(미국을 모르는 독자가 읽을 때 이 같은 결론은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핀천 특유의 정치적인 음모론이 더해지면서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는 흥미로울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나 주석을 찾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작품을 즐기기보다는 이해하기에 바쁜 상황에서 작가의 의도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솔직히 지나친 바램일지도 모른다.

 

60년대를 회상하는 것은 즐겁다고?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즐거움은 가치가 있다고? 내게 있어서 바인랜드에서 기대했던 것은 중력의 무지개에서 보여주었던 수많은 과학적 용어의 문학적 표현이였고,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단편 엔트로피와 같이 과학적 현상을 문학적으로 치환된 소설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였다. 핀천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며 가장 매력적인 과학과 문학의 융합은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서 다른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과학적 사고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였다.

 

물론 이 작품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핀천식 과학적 묘사는 살아 있었고 특유의 음모와 미국의 미디어가 결합된 정보의 홍수가 만들어내는 방대함이 독자를 압박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부분은 조금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보다 광범위한 과학의 문학적 묘사를 기대하였으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소설의 가치를 만들어 낸 것 같다.

 

중력의 무지개를 난 이해하지 못해지만 문장을 읽는 재미가 있었고, ‘49호 품목의 경매는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에서 보여준 문학적 가능성은 분명 핀천이기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하지만 바인랜드는 그 동안의 핀천스러움보다 소설에 가까운 느낌만이 남은 것 같다.

 

얼마나 많은 미국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영어는 얼마나 공부해야 할 것인가? 결국 이 작품을읽고 난 후 알게 된 것은 자신의 미숙한 문학적 소양과 이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숙제만 쌓이게 만든 것 같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