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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를 읽고 느꼈던 아베 고보의 이미지는 카프카와 까뮈였다.

불타버린 지도를 읽으면서 느꼈던 아베 고보의 이미지 역시 카프카와 까뮈였다.

그러나 불타버린 지도를 읽고 난 이후 느낀 아베 고보의 이미지는 아베 고보였다.

 

모래의 여자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를 빚어내는 문제작가, 또는 카프카를 일본식으로 변주시킨 다음 까뮈의 철학을 가미한 작가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불타버린 지도를 읽고 난 후 이 같은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정도로 아이덴티티를 확고하게 지니고 있으면서도 소설의 영역을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작가에게 실례되는 발언이였기 때문이다.

 

모래의 여자에서 보여준 현대인의 모순적인 삶의 이치는 불타버린 지도에서 또 다른 형태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어느 새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같이 되어버린 삶의 방식을 모래의 여자에서 보여주었다면 불타버린 지도에서는 어느 새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도시인의 소외를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존재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채 망각으로 인해 나라는 본질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결국 소외될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지닌 형태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일치시키지만 기억의 유무에 따라 인식의 차이를 통해 모순된 상황을 그려내었으며 특히 단순한 배치의 반복이 복잡함을 이루는 도시의 특징을 부여함으로써 이 같은 상황을 더욱 강조하였다. 기억의 유무에 따라 같은 장소를 인식함에 있어서 극명하게 대비되며 받아들이게 되는 동일한 정보에 관한 이미지가 전혀 다르게 되는 과정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익숙함과 소외감이 혼재되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면서 작품을 마무리 한다. 실종자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몇 개의 단서와 이를 바탕으로 추리해 가는 과정은 일련의 미스터리 소설 또는 탐정 소설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중간 중간 삽입되는 에피소드와 대화 속에서는 과거 철학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사고의 깊은 늪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무거움이 느껴진다.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 궁금함으로 채워진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되나 어느 순간 궁금함의 대상은 극적으로 뒤집어지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야기는 연결되어 순환고리를 구축하게 되고 독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실종자를 추적해가던 주인공이 마지막에는 결국 실종자가 되어버리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역전 될 수 밖에 없는 뫼비우스의 띠였으며 작가는 소설에서 이 같은 뫼비우스의 고리를 완성하면서 서문에 있는 도시의 의미와 결합시켜 현대인의 존재에 대한 물음표를 완성해 내었다.

 

주인공의 이름을 왜 그렇게 설정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을 이렇게 구성해야 했는지, 몇 개의 단서를 통해 추리해가는 탐정 소설의 묘미를 이렇게 사용해야 했는지작가의 선택은 파격적이였고 충격적이였다. 하지만 이제껏 접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경험은 작가에 대한 감탄사를 연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 이제까지 존재하던 소설의 형식을 조립하여 접근성을 높임과 동시에 각각의 소설의 지닌 특징적인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영역을 경험시켜주었으며, 현대인들의 모순에 대한 주제를 펼쳐냄에 있어서 또 다른 파격적 시도를 통해 아베 고보의 이름을 각인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