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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딧세이야는 오딧세우스(율리시스)가 10년간 세상을 떠돌며 겪은 파란만장한 모험담을 신화적 모티브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펼쳐내며 독자들을 압도시켰다. 고대의 영웅신화의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해 내었으며 거대한 이야기의 줄기는 길고 긴 세월의 강을 따라 흐르듯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현재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는 절대적 고전의 위치에 존재하게 하였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통해 이 같은 오딧세이야의 스키마를 이루면서도 대극의 위치를 보여주며 또 따른 영웅신화를 그려낸 20세기의 최고의 고전의 대열에 위치시켰다. 단 이번에는 고대의 영웅신화가 아니라 아일랜드 시민들의 삶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계속해서 영속시키는 결과를 이루었다.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단 하루 동안의 일어난 사건들을 펼쳐낸 이 작품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세상을 떠돌며 환상적이고 기상천외한 모험을 겪은 율리시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단 하루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이라는 한정 된 공간 안에서 일상적인 소시민적인 삶의 단면들을 의식적으로 나열하면서 리오폴드 블룸이라는 20세기의 율리시스를 탄생시켰다.(또한 오딧세이야는 일리야드라는 또 다른 거대한 서사문학을 앞선 배경으로 깔고 있다면 율리시스는 스티븐 데덜러스의 성장 소설-또는 교양 소설-이기도 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이야기를 율리시스의 앞선 시점에 위치시켰다.)

때문에 율리시스의 이야기는 지극히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한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일을 한다. 저녁에는 술을 마시고 때로는 시비가 붙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정치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서로간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내 잠을 잔다. 커다란 사건도 없이 무언가 갈등을 표면화시켜 크게 벌리는 일도 없다. 스티븐 데덜러스-리오폴드 블룸-몰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은 비교적 간단하게 도식화시켜 손쉽게 작품 속 구조식을 그려낼 수 있게 된다. 별 것 아닌 하루가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리오폴드 블룸의 모험은 바로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 안에서 제임스 조이스에 의해 놀라울 정도로 위대한 하루로 변하기 시작하고 율리시스라는 작품은 놀라움으로 가득 채워진 작품으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화려한 사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려한 문장과 단어들로 환상적인 소설, 아니 전에 없는 기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가득한 소설로 탄생시켰다. 읽으면 읽을 수록 혼란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메타포와 지식들을 압축하는가 하면 재미있는 말장난을 남발하며 익살기 넘치는 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소변 보는 장면을 더할 나위 없이 스펙타클하게 묘사할 정도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장난기 가득한 천재성을 보여주는가 하면 철저한 연구와 이해를 바탕으로 도전해도 정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함으로 독자들을 좌절시킬 때도 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신들이 인간계를 관측하면서 이리저리 재미 삼아 문제를 던지듯 제임스 조이스는 ‘덤빌 테면 덤벼봐! 실컷 가지고 놀아주지!’ 듯한 느낌으로 독자들에 평생에 걸쳐 도전하고 싶은 소설을 보여주었다.

곳곳에 숨어 있는 패러디, 말장난, 수많은 정보의 집합체와도 같은 메타포의 향연은 만한전석(滿漢全席)같은 실험적 문체들의 집합과 함께 하며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실험성과 실험성의 만남에 그치지 않고, 실험성과, 컬트적 성향, 그리고 다양한 정보나 지식이 제임스 조이스라는 한 개인의 자전적 성향이 더해지며 단어와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 내는 문장, 그리고 문장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단락과 특유의 문체가 저마다 새롭게 조립되어 다채롭고 풍부한 소설로 탄생시켰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가 아니라 별 것 없는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될지를 추구한 결과 도달한 정점에 위치한 작품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리오폴드 블룸의 모습은 조금씩 캐릭터적인 구성을 완성시켜 가며 독자들로 하여금 그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수많은 인파 속을 지나가면서도 고독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았고, 겉으로는 문제시 되지 않아 보이지만 내면에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심리적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유태인이라는 태생은 블룸을 더욱 고립되게 만들었고 고립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가족관계 역시 가정이라는 안정 된 보금자리의 행복감이 아니라 위태하기만 삶의 또 다른 장소일 뿐이다. 결국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서 잠시도 휴식 같은 편안함을 지속시킬 수 없고, 더블린이라는 제한 된 공간 안에서도 방랑할 수 밖에 없는 오딧세이야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작품에 대한 이해나 이야기의 흐름과는 별개로 블룸의 모습은 매일같이 시내를 방랑하는 시민들의 현재와 미래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된 것도 이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의 이야기를 새로운 방법으로 경험시켜 더블린의 모습과 더블린의 사람들의 삶의 단면들을 다른 차원으로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즉, 율리시스의 이야기는 어딘가의 환상이 아니라 바로 현대인들의 또 다른 삶의 단면들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일지 모르지만 과거의 모습,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단 하루의 이야기이고 앞으로도 반복 될 수 밖에 없는 하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율리시스의 하루는 가장 위대한 하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그것은 가장 위대한 더블린의 하루이고, 더블린 시민의 하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6월 16일마다 개최되는 ‘블룸스 데이’가 계속되는 한 말이다.